오늘은 보르도 와인 마셔본 후기를 남겨보고자 합니다. 심지어 리스트의 면면이 화려했습니다. 2010빈티지의 샴 두병과 2018빈티지의 불곤 블랑 두병 비교만으로도 제 구미를 당기긴 충분했는데, 무똥이라니! 제가 5대 샤토를 마셔본 경험은 시음회에서 마신 한잔이 유일한데, 이는 4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음회를 가다
바로 제임스 서클링 시음회때 접한 것인데요, 2009년 빈티지(JS98; 2010년대 빈티지로 착각했었네요)를 마셔보았습니다. 핑구스와 더불어 가장 줄이 긴 와이너리였는데, 제가 일찍 줄을 선 덕에 일반입장 중에선 가장 먼저 맛본.. 취하기 전이기에 더 기억에 많이 남는 와인이었습니다. 좋은 빈티지였던 만큼 , 팔렛이 굉장히 강렬했습니다. 독특하게 savory한 맛 때문에 코 막고도 블라인드해서 맞힐 자신이 있었는데요. 향이 어려서 덜 풀려있었기에 꼭 다시 만나길 고대한 와인입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어제 겨울배낭님 덕에 2003빈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ㅎㅎ
본론으로 들어가 첫 와인입니다.
듀발 르로이가 제안해서 생긴 4년마다 치루는 MOF의 소믈리에 부문에서 최고로 뽑힌 소믈리에가 양조에 참여한 샴페인입니다. 코트 드 블랑의 그랑크뤼 밭들로 양조했으며, 2010년 빈티지, 2022 데고르쥬멍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3차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익은 과실향이 풍성하고 입에선 산화 풍미가 느껴집니다.
감칠맛이 좋고 묵은 과일 풍미의 부드러운 맛에서 끝에 카랑카랑한 블랑드블랑의 산도를 보여줍니다. 그덕에 우니/관자요리, 튀김류와 페어링이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온도가 좀 올라가니 감칠맛이 폭발하네요.
국내에서 구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와인을 선뜻 맛보게 해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숙성했을 때 3차향이 매우 궁금해지는 와인입니다.

다음으로 역시 2010빈티지의 vincent couche입니다.
데고르쥬멍 2020, PN74%, 나머지 샤도입니다.
특이하게 자연효모를 이용해 양조했다고 합니다.
첫향은 강렬했고 또 이상했습니다. 맛도 좀 이상했습니다. 좋고 나쁘고 가 아닌, 그냥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처음 맛보는 샴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다시 찬찬히 분석해보니 환원 뉘앙스와 산화 뉘앙스가 엉켜있습니다. 노즈는 환원쪽이, 맛은 산화 풍미가 더 강했거, 세파쥬를 모르고 마셨을 때도 블랑드 누아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여기서 딱 직감했습니다. ‘아, 천천히 마셔야하는구나.. 환원취가 풀리면 아름다울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온도 높은 잘토잔에 두고 기다렸습니다. 스월링을 할수록 나아졌는데,
nutty함 없이 꿀향과 멍든 사과 및 산화 풍미가 강하게 느껴지더군요.
우아하다기 보단 탄탄한 느낌이었고 레드 음용 온도까지 올라가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나 한시간 넘으니 더 디벨롭 되진 않더군요.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다음은 MAISON C. THIRIET BOURGOGNE CONFIDENTIELLE BLANC 2018입니다. 매해 다른 밭의 포도를 조합해 쓰는 것 같은데, 이 해에는 주로 뫼르소였다고 합니다. 퓔리니나 샤블리 밭을 쓸때도 있고, 알리고테나 피노블랑을 넣기도 한다고 하네요. 일부 뉴오크를 쓴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잘토 버건디에 담았습니다. citrus와 깨끗한 오크향이 납니다. 팔렛은 균형이 잘 잡혀있고, 특징적으로 입에서 약간 민트의 화함을 부여합니다.
온도가 올라가면서 약간의 건초와 먼지에 가까울 정도로 빻은 견과류향이 나타납니다. 민트 사탕향도 나네요. 조금 닫힌 뉘앙스라 역시 잔에 둔채로 천천히 마셨습니다. 레드로 한바퀴 돈 후에 다시 마셔봤는데요, 볼륨이 점점 커지면서
orange blossom과 망고향 혹은 황도복숭아 향이 납니다. 정말 분수처럼 향 뿜어져 나와서 놀랐습니다. 화려하고 매혹적인게 광장 한복판에 자리한 분수대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보이는 순간 같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버터와 과실 농축미의 조화로웠고, 맛은 약간의 단 뉘앙스가 있었으며 아주 탄탄한 구조감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부드럽고 풍만한 느낌입니다. 한시간정도 오픈한 후에 마시기 시작했는데, 잔에서 두시간 지나니 더 좋아졌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으론 상온에서 브리딩을 좀 오래 해둘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여유를 두고 마시고 싶었는데 시간상의 이유로 어떻게 더 변화하는지는 못봤네요ㅜㅜ
다음은 아무도 단독 사진을 안찍어준… 비운의 와인 Domaine Bachelet-Monnot Bourgogne Blanc 2018입니다. 퓔리니 근처 밭이라고 하고, 평균수령 50년이라고 하네요. 뉴오크 비중은 25%, 12개월간 숙성하고 앙금 접촉도 반년이상한다고 합니다.
잘토 잔을 다 쓰고 있어 일반 잔에 담았습니다. 동석자분들 중에서 퓨어한 느낌이다 라는 평이 있었습니다.
바닐라와 부드러운 크림 풍미가 느껴지고, 텍스쳐 역시 둥글둥글합니다. 온도가 올라갈수록 오크 뉘앙스가 강해지지만 향이 다양하게 피어로는 느낌은 아닙니다. nutty해지기도 하네요.
피니쉬가 버터리한데.. 좋은 뉘앙스는 아니며 끝이 좀 씁니다.
직선적인 이미지이고,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변하지 않았습니다. 너티한게 쥐라 느낌까지 살짜쿵 있었네요. 지금 바로 마시기 좋은 와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망의 메인 와인입니다. 93빈 마고 밭의 아이와 비교해서 마시게 된 2003 무똥 로칠드. 사실 저 마고 와인도 마셔보고 싶은 아이였는데 너무 좋은 기회였습니다 ㅎㅎ
무똥은 하루전 누주 이슈가 있었으나 오픈 직후 향은 괜찮았다고 합니다. 2003빈은 메를로 비중이 20%대로 꽤 높았습니다.
두 와인 모두 따른 직후의 향이 정말 좋았습니다. 확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는데, 둘다 스월링하면서 차분해져버렸습니다..
무똥의 초반 향은 오래맡으면 끝에 VA가 살짝 느껴졌고 약간의 피라진도 있으면서 삼나무향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우유의 부드러운 혹은 실키하다고 할 텍스쳐의 향이었네요.
팔렛도 부드러웠는데, 탄닌이 적었고 입안에 굴려도 볼에 조금 남는 정도였습니다. 입안에선 코보다 과실향이 많이 느껴졌고, 보르도 특유의 매운맛이 잘 살아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서 민트와 담배, 시가박스의 숙성향도 나타나는데, 초반의 우유 택스쳐는 유지했습니다. 한시간 반정도 지나선 계피와 자두향이 더 났는데, 특히 정향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입에서 나무 텁텁한 맛이 점점 강해집니다.
굉장히 긴 피니쉬인데 강도는 낮았습니다.
탄닌이 적지만 항상 있긴 한데, 굉장히 입자가 고와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전에 맛본 2009년과 너무 다른 와인이었습니다. 눈가리고 마시면 다른 와인을 얘기했을 것 같네요(물론 둘다 보르도 좌안).
같이 비교한 Chateau Malescot St Exupery 1993은 까쇼 50, 메를로35, 까프10 등으로 블렌딩되었습니다. 첫향은 woody했고 장미와 끝에서 레드페퍼가 느껴집니다.
이끼향도 나면서 3차향이 풍성한 와인이었습니다.
바디와 구조 많이 풀린, 탄닌도 거의 다 녹아들은 모양새이며 산도는 다행히 은은하게 잘 받혀주고 있었습니다.
첫향이후론 좀 닫힌 느낌이다가 시간이 좀 흐르고 익은 과일, 구운과일과 말린 raspberry, 가죽향이 나며 무엇보다 후추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탄닌만 좀 더 있었다면 항정살과 궁합이 좋았을텐데… 맛은 과일보단 savory, 연필느낌이 좀 강해서 부담스러웠습니다.
(잘토잔에 옮김)90분정도 지난후엔 후추 배경에 정향과 장미가 강하게 뿜어져나왔습니다. 처음 마셨을때 피어로는 강도였다면, 마지막의 모습은 그 갑절은 되는..! 이 와인의 마지막 연주를 듣는 기분이었는데, 장미향덕에 처량하기보단 격조 있었습니다.
2003, 1993 모두 좋은 빈티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두 레드 모두 유사하게 무너져가는 고성을 보는 듯합니다. 무똥은 벨벳 커튼과 페르시안 카펫으로 치장했으나 금이 가기 시작한 기둥을 감추지 못한 성이었고, malescot은 버려진 이후이 이끼와 덩쿨이 외벽을 부순 성과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알보용으로 무려 cdp를 도네해주셔서 맛있게 마셨습니다. 달큰한 빨간 과일부터 검은과일, 축축한 숲바닥부터 허브들까지 보여준 와인입니다.
제게 있어서 와인은 음악, 미술 등 다른 어떤 예술의 장르보다도 몰입해서 향유해 온 취미입니다. 인터넷에 와인 모임은 많지만 비나모르만큼 와인을 진지하게 대하고 역사가 깊은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